빗방울에 감정이 스며있으므로
w. 젤라또
간혹 그런 날이 있다. 예기치 못한 비가 가득 내리고 우산은 아무도 없는 날. 이럴 때면 수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야속하기만 하다. 처마 밑에 버티고 서있는 것도 한계가 있지. 툭툭 떨어지는 물이 신발 앞에서 터져 발목까지 튀는 바람에 이미 그 아래는 축축했다. 언제쯤 올까. 의미 없이 제 치맛단을 털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간만에 둘이서 외출하는 날이었는데 이리도 재수가 없을까. 카오스는 회색빛으로 침침하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외출 동반자인 니키는 이미 우산을 찾아오겠다며 뛰어간 뒤였다. 자신은 사이보그이니 비에 젖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나. 그러고도 한 10분은 지났으니, 아무리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찾으러 가봐야 하나. 카오스가 슬슬 그런 생각을 할 때, 저 멀리에서 제 손에 든 것을 휘적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낮고 어두운 색의 구름들 아래에서도 눈에 띄는 머리카락. 니키였다.
“우산을 찾았으면 쓰고 오지 그랬어.”
“어차피 젖었는데 뭐.”
흥, 가벼운 소리를 내며 니키가 우산을 펼쳐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끝까지 자신은 쓰지 않겠다는 모양새였다. 그냥 같이 쓰면 될 텐데. 불평어린 말을 꺼내자 니키는 제 어깨를 으쓱 했다. 이미 푹 젖어버린 몸을 가지고 같이 들어가 봐야 카오스를 축축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이야 물을 빼면 끝나는 일이라고 해도 상대는 아니다. 감기에 끙끙 앓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 삐죽이는 그녀의 입도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그럼 열차로 가?”
“당장 수리하려면 거기로 가야지.”
“감기는 안 걸리는데 수리는 해야 한다?”
카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이 걱정인 것을 알기에 무어라 반박할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만 온전히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기껍다 말한다면, 너는 뭐라고 이야기 할까. 니키는 어쩔 수 없이 웃음소리를 냈다. 이런 식의 감정이 어색한 동시에 제 속을 평안하게 만든 탓이었다.
그 반대편에서 일부러 뾰족한 표정을 짓던 카오스도 저런 웃음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랬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감정에 휩쓸린다. 어쩌면 함께 손을 잡아서일 수도 있고, 그저 함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은 닮아있다는 것이다. 모든 점이 다르다 해도 쌍방 잃어가던 감정을 되찾아준 존재임은 진실이다. 그래서 그랬다. 네가 그렇게 진심으로 웃을 때면, 나도 같이 행복해지곤 했다고.
카오스는 제 입 밖으로 말을 내미는 대신 니키의 손을 잡았다. 빗방울에 젖어 차갑고 축축해진 것이 따뜻한 손길에 감싸였다. 그것이 말할 길 없이 어색한 감각이었음에도, 니키는 그것을 꽉 맞잡았다. 이렇게 너를 잡고 있을 때면 조금은 더 안심이 되는 듯 했다. 온통 차가운 소나기 사이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선명했다. 이리 닿아있을 때면 네가 내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잡을 수 있으니까. 니키 역시도 제 생각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침묵은 한없이 평안했다. 리버스 시티,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곳에 향하는 내내.
이윽고 제 드론이 가득한 열차 내에 자리를 잡은 니키가 간이 수리소를 열어보였다. 구경한다고 해도 별로 좋은 구경거리는 아닐걸. 부루퉁한 어조였으나 자리 잡은 곳을 보아하면 생각하는 게 뻔했다. 제 아지트였던 곳에 카오스가 있는 게 기꺼운 것이다. 아마도 오늘은 어차피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 김에 여기서 좀 놀다 가라고 하겠지. 그런 추측을 하자 걱정 사이에서도 웃음이 툭 새어나왔다. 급히 카오스가 제 입가를 가리긴 했으나, 니키는 이미 모든 걸 본 뒤였다. 그가 뭘 그리 웃느냐며 그녀의 이마를 꾹 누른다. 소소한 부끄러움의 표시였다.
휴일이란 단어는 카오스에게 낯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메이플 월드로 온 뒤 얼마나 오랫동안 확실한 휴식 없이 뛰어다녔던가. 그런 사이에서 하루 종일 쉴 수 있는 날을 요구하게 된 것도 눈앞의 이 덕분이었다. 연합에서야 저 치를 데려왔느냐며 말이 많았지만, 덕분에 차차 밝아지는 카오스의 모습에 다들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이들 앞에서 보이던 모습과, 니키 앵글러 앞에서 보이는 모습 사이에는 얇아 보이면서도 단단한 벽이 있다는 걸.
그래서 그 대단하신 휴일에 무슨 일을 하느냐. 그런 걸 묻는다면 카오스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니키랑 같이 지내지. 평소에도 그리 붙어 다니는데 휴일까지도? 그런 질문을 내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대적자였던 카오스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가장 단단한 지지대였으니까. 더군다나 뒤에서 눈에 불이 붙어라 노려보는 니키의 시선이 있는데, 어떻게 대놓고 무어라 하겠는가. 나인하트쯤 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다, 그 강심장의 소유자인 나인하트 본인도 그냥 놓아두라며 말한 뒤였다. 결국 카오스의 휴일은 니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휴일에 보는 광경이 이런 것일 줄이야. 카오스는 자리에 주저앉은 니키 옆에 붙어 조수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드라이버, 펜치. 그렇게 말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주고 있자면 니키의 몸이 분해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안에 들어찬 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새 부품으로 교체하거나 물을 탈탈 털어내는 모습이 묘하게 신기했다. 정말로 사이보그구나. 카오스는 자기도 모르게 니키의 심장 근처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심장 소리가 들리나, 너는 내 곁에 살아있나. 그것을 말하거나 알아내기도 전에 니키의 몸이 뒤로 빠졌다.
“갑자기 어딜 건드리는 거야?”
“그게…….”
손끝의 감촉이 선명하질 않았다. 네가 내 곁에 있으면서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었어. 네가 나를 원하듯이, 나 역시 너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그저 심장의 고동만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그랬다. 네가 느끼는 불안을 옅게나마 느낀 것일까. 카오스는 그 중 한 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으나, 니키는 언어로 정립되지 못한 상대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한 듯 제 몸을 바로 했다.
허공에 떠있는 상대의 손가락 사이에 제 것을 끼워 맞춘다. 사람의 손이란 신기하다. 이렇게 마주 대어 깍지를 끼자면, 다른 어느 때보다 깊이 연결된 기분이 들곤 하니. 그것은 드라이버 같은 공구로 나사를 조이는 딱딱한 감각과는 달랐다. 서로의 피부가 맞닿아 감촉을 전한다. 절단되고 깎여나가 억지로 맞춰진 것들과는 애초에 같을 수가 없었다.
너를 처음 봤을 때 이런 감정이었어. 언젠가 니키가 깍지를 끼며 카오스에게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비웃을까. 입 밖으로 낸 순간의 감상이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카오스는 제 손에 힘을 주기만 했다. 너와 닿아있을 때면 내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걸. 그런 대답을 들은 뒤로, 니키는 종종 이렇게 손을 겹치곤 했다. 카오스는 제 감정을 어떤 것인지 잡아내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그렇다면 그걸 알려주는 것은 유일한 이해자인 제 역할이리라.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더라도, 나는 네 곁에 있을 거라고.”
네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 나의 감정은 한 번도 거짓된 적 없었으니. 너는 심장의 고동으로 증명 받으려 할 필요가 없어. 네가 내게 모든 것을 걸었듯이 나는 네 모든 것을 나로 물들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테지. 한없이 가볍게 꺼내는 말이며 한없이 가라앉는 감정이다. 그 끝에서 기어코 하나가 되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함께하거든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받은 구원의 가장 기쁜 결말일 터다. 나는 너를 기어코 내 것으로 만들겠지. 속삭이는 소리에 카오스는 손을 조금 더 꽉 붙잡았다.
몇 번이고 확신 받았다. 니키는 언제나 제게 그러했다. 언제까지고 카오스가 진실로 의미를 가진 존재라 말한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한다.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 너와는 다른 처음이겠으나 그럼에도 온전히 낯설기만 한 것. 애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대답하자니 언제나 말은 같았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네가 망가트렸노라 말하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애정이라고. 그러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간 미소 짓는다. 간단하고도 확실한 애정의 증명이었다.
마저 수리는 해야겠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확신도 하지 않은 채 니키가 제 입에 나사를 물었다. 손길에 따라 움직이는 몸의 부품이 낯설었다. 이것은 매번 그가 스스로를 수리할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묘한 느낌이었다. 제 속에 완전한 심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은근히 가슴 안쪽이 조여드는 감각이 불쾌하기보다는 설렜다. 내 안에 심장이 있었더라면, 방금 네게 내 마음이 얼마나 자기주장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었겠지. 그 생각에 문득 니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카오스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리를 모아 무릎 위에 제 고개를 올린 채 눈을 깜빡인다. 약간은 눌린 뺨이 부드러워보였다. 그 모습에 니키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 이 빗물에 젖은 몸의 창조자. 그 분은 언제나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니키의 머릿속에 가득 차는 사람이었다. 가히 애증이라 말할법한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내쳤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방금 전까지 제 안을 채우던 것은 오로지 카오스 하나뿐이었다.
“왜?”
카오스가 입을 뻐끔거리며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양 옆으로 묶은 양갈래 머리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조금 더 아래로 늘어졌다. 그 평안한 모습에 니키는 자기도 모르게 묘한 얼굴을 했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도 제 아버지의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기보다는, 카오스의 움직임에 시선을 붙이고 있으니.
“그냥. 신기해서.”
평생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너 하나로 인해 허공에 흩어져버렸으니. 이게 감정인 거겠지. 하나의 애정이고. 니키는 카오스가 계속해서 물어보는 신기함의 이유를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제 옆에 붙어서 종알거리는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내가 계속 이렇게 네 옆에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질문과는 다른 대답에 카오스가 자그마한 불만을 드러냈으나, 그럼에도 곧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모든 걸 알 수 없음에도 니키의 감정만큼은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카오스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도, 니키. 영원히 네 곁에 있고 싶어.
빗소리 사이의 고요, 둘은 그저 그 안에서 서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Written by jellatho (@jella_commission)